25기 권제경의 갤러리
나의 사진은 보통 근거물 혹은 편지이다. 근거물은 ‘자(自)’라 불릴 수 있는 나를 위한 것이고 편지는 ‘타(他)’로 불릴 수 있는 너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그럴듯한 시각을 상실한다면 증거물과 편지 모두 그 의미를 상실할 것이다. 나는 그 상실이 되도록이면 거짓이길 바란다. 하지만 그럼 희망과는 별개로 상실했을지 모르는 시각을 통해서 여전히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그 시각을 바탕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판단하고, 전달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의 근간이 될 시각의 투명성은 언제나 불확실하다.
사진을 찍고 전달하는 과정에 대해 생각한다면 먼저 나(혹은 카메라)와 피사체 사이에서 자와 타의 관계가 발생하고, 이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또 한 번 자와 타의 간극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사이에는 항상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막이 존재한다. 그 불확실한 막은 나의 상실된 시각에서 유발된 것임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세상에 항상 존재하는 존재이다. 그러한 막에 대한 탐구는 여전히 진행되는 중이며, 지금까지의 탐구 과정을 다섯 장의 사진에 담아보았다.

<Membrane or Curtain 1>
420mm x 280mm | 2025
Pentax PC35af | FOMAPAN 200
모든 자와 모든 타 사이에는 ‘막’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완전한 본질에 도달할 수도, 완전한 합일을 이룰 수도 없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정하면 세상은 꽤 단순해진다.
<편지 혹은 근거>
‘막’이라는 것을 처음 탐구하게 된 것은 그저 대상물과 카메라 사이에 존재하는 막이라는 물질의 독특한 비주얼이 매혹적이었기 때문이다. 막은 투명하면서 불투명하고, 고체이면서 유동적이고, 반사되면서 투과되기도 한다. 이를 보통 반투명, 반고체, 반투과라고 표현할 수 있지만 막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그저 ‘반(半)’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부적합했다. 막의 그러한 특징들은 보통 나의 위상과 관련이 있고 내가 카메라를 옮김에 따라 노출을 변경함에 따라 ‘막’은 그 특성을 달리한다. 그렇기에 막은 굉장히 불특정적이며 불확실하다.
그 후 나가 상정한 막의 의미는 물질로서의 의미를 넘어 형이상학적 상상으로 이어졌다.
비닐, 결로, 천막 같은 것뿐만 아니라 습기, 공기, 강렬한 빛, 혹은 바람도 막이 될 수 있으며 막의 의미는 단계를 거쳐 세상의 모든 것으로 확장되었다. 곧 막은 자와 타 사이에 언제나 불확정적이고 불확실하게 분포되어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세상 혹은 본질을 분명하고 명쾌하게 목격할 수 없다. 이러한 사고의 흐름은 이데아론의 힘을 빌려 더 고고한 영역으로 확장되었고 결국 나는 그곳에서 멈추었다. 그저 내가 세상의 본질을 목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고 이에 따라 내 세상은 복잡함의 영역에서 단순함의 영역으로 복귀하였다.

<Billboard in ’Nam 1>
420mm x 280mm | 2025
Contax T2 | Kodak GOLD 200
황폐한 빌보드는 아무것도 지칭하지 않는다.
이 가엾은 광경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제공하지 않는다.
어느새 아무런 증여가 없는 관계가 반가운 날들이 쌓여간다.
<편지 혹은 근거>
단순함을 인정한 나의 삶은 황폐해지기 쉽다. 그 어떤 본질에도 다가설 수 없음을 인정한 태도는 그 어떤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거나 신뢰하지 못하는 선택으로 이어질 수 있고, 이는 곧 무관심으로 이어진다. 마치 황폐한 빌보드를 보듯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명쾌해지기도 한다. 저 빌보드는 아무것도 지칭하지 않고, 알려주지 않는 정보가 편안하다. 가치판단을 위한 일말의 공간도 제공하지 않고 그렇기에 내가 직접 가치판단을 할 필요도 없어진다. 단순하고 명쾌한 삶을 위해서 보이는 모든 것을 저 황폐한 빌보드를 보듯 목격하며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도 일종의 삶의 태도이고 누구도 쉽사리 비판할 수 없는 태도라 믿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현대사회에서 무관심은 죄의 영역에 들고 있다. 그리고 이는 어느 부분 타당하다.
선과 악을 논하기 전 그리고 죄에 대해 논하기 전 나는 오직 태도에 대해 생각한다. 나의 태도는 마땅한가에 대해 생각하고 그렇다면 죄의 유무와 선과 악의 이분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도 무관심의 나에게 마땅한 태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저 황폐한 도로에서 더 나아간다.

<Membrane or Curtain 2>
420mm x 280mm | 2025
Leica M-P | 50mm | F4 | 1/4000s | ISO400
다시 마주한 도시의 ‘막’이다.
열렸다고 하기에는 애매한,
그렇다고 닫힌 것도 아닌 저문이 의미하는 것이 환대일지 적대일지 알 수 없다.
열어도 좋고, 스쳐 지나가도 좋다.
<편지 혹은 근거>
다섯 작품 중 유일하게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작품이다. 그 덕에 여러 구도를 시도하며 가장 원하는 장면을 얻을수 있었다. 내가 담고자 한 것은 막 너머에 있는 문이다. 사진을 공부하며 알게 된 사실은 사진 속 몇몇 물체들은 그 물체가 가지는 의미 그 이상으로 해석될 여지를 역사적으로 갖게 되었다. 그런 것들로는 중절모, 코트, 의자, 문과 같은 것들이 있고 문의 경우 그 해석의 방식이 꽤 단순하다. 문의 열림 정도 그리고 문의 너머를 보고 해석할 수 있다. 사진 속 문의 경우 열렸다고 하기도 애매하고 닫혔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정도의 열림이며 아무도 열고 싶지 않은 문이 될 수도 있고, 한 번은 열어볼 만한 문이 될 수도 있다. 무관심이 내 삶에 딱 그런 갈림길에 선 적이 있었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무관심해질지 혹은 작정하고 관심을 가져볼지에 대해 고민했고 나는 선택을 했다.

<Billboard in ’Nam 2>
420mm x 280mm | 2025
Contax T2 | Kodak ULTRAMAX 400
열어서 마주한 것인지, 스쳐 지나가서 마주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빌보드,
새로운 삶을 지칭하는 저 색채는 아주 진하다.
유례없이 좋은 예감이 든다.
새로운 삶은 좋은 것인가.
<편지 혹은 근거>
앞서 본 문을 여는 것과 열지 않는 것, 무관심을 택하는 것과 택하지 않는 것은 연결되지 않는다.
우리는 각자의 선택을 했고 그에 따라 자신의 태도를 확립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마주한 것은 저 빨간 빌보드이다.
빌보드에는 New Life라는 문구가 있고, 저것은 사실 한 인터넷 회사의 광고이다. 그리고 나는 구도를 통해 New Life라는 문구만을 취했다. 저 빌보드(New Life만을 취한)는 예감이 아주 좋다.
명쾌한 빨간색과 새로운 삶이라는 문구는 나에게 좋은 기분을 가져다준다.
저 빌보드가 나와 우리를 응원하는 것이 분명하다.

<New Born>
420mm x 280mm | 2025
Contax T2 | Kodak ULTRAMAX 400
새로운 삶을 위해 새롭게 태어나는 쪽을 택한다.
신생은 특권이 아닌 그저 선택의 문제이다.
그리고 보통 선택 쪽이 특권 쪽보다 힘겹다.
다시 태어난다면 저 노란빛처럼 진한 명쾌함을 안고 살 것이다.
<편지 혹은 근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무관심을 버리는 쪽을 선택했다. 만약 무관심을 택한다면 나는 근거물을 남길 수도, 편지를 전달할 수도 없기에 그리고 내가 보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없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니기에 용기를 내어 유(有)관심을 선택했고 그 결과 항상 골치 아픈 가치판단을 끊임없이 해나가는 중이다. 가치판단에는 정답이 없다. 그리고 접하는 정보가 많을수록 그 판단은 힘들어진다. 그래도 묵묵히 보고 듣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중이다. 그러다 보면 저런 아주 노란 빛의 꽃을 보기도 한다. 위로 무럭무럭 자라지 못한 꽃이지만 꽃 한 바가지라는 표현을 쓴다면 저 꽃의 집합이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나에게 힘을 주는 사진이다. 그리고 저 사진을 볼 때면 뭔가 새롭게 태어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새로운 삶에 대해 언급했는데 사실 그건 불가능하다. 우리 삶은 아주 연속적이고 그렇기에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은 눈속임에 불과할 것이다. 그럴 때면 저 꽃 사진을 보면 된다. 매번 볼 때마다 새롭게 태어난 것 같은 감상을 주는 저 사진과 함께라면 힘겨운 선택을 한 일상들도 쉽게 회복이 되는 것 같다.
항상 저 노란빛의 명쾌함을 안고 살고 싶다.
다시 생각해도 사진은 나에게 근거물이자 편지이다. 그리고 근거물과 편지를 신뢰할 수 있기 위해서 나는 최대한 많이 사려 깊게 관찰해야 한다. 그래야 내 사진이 유효하다. 결국은 본 것을 찍는 것이 사진이겠지만, 그 말은 곧 본 것 중에 찍는다는 의미를 함유하기도 한다. 무관심을 관철된 삶에서 본 것을 찍는 것은 유효하지 않다. 그렇기에 하루하루 관심을 가지고 사려 깊은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자, 소외된 것을 더 많이 목격하고자 노력한다. 세상은 보면 볼수록 참혹하고 잔인한 구석이 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아주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무관심 속에서 아주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구석을 보는 것은 너무 편파적이고 나의 지향점이 될 수 없었다. 여러분도 선택한다면 유관심 쪽을 추천한다. 그리고 만약 이 글을 끝까지 읽고, 나의 사진을 유심히 봐준 여러분이라면 다정함 그리고 사려깊음 쪽이 잘 어울리는 사람일 것이다. 사려깊음으로 만들어가는 다정함의 세계는 세상의 잔혹함과 잔인한 구석을 덮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소통의 창을 항상 열어둘 수 있을 것이다. 다정함과 사려 깊은 그리고 소통이라는 것이 다소 이상적으로 들릴 수 있으나 그 정도의 이상은 소박하고 지당한 희망이라는 생각을 전하며 글을 마무리한다.